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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좋은 101가지 이유 - 정재욱(사학 78) 편집위원
17.11.29 조회수 : 1,504
건대동문

겨울을 대표하는 오랜 아이콘은 이다. 상상만으로도 겨울은 푸근하고 여유롭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곳간에 겨울을 날 양식이 어느 정도 쌓이면 마음도 풍성해지게 마련이다. 때 아닌 겨울 예찬을 늘어놓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너무 과로에 시달리고 있어서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 세계에 서 가장 짧은 기간에 산업화를 일궈 낸 건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쉬어가며 일을 할 때가 됐다. 젊은 직장인들이 고임금보다 칼퇴를 더 선호하고 있다. 조금씩 세상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얼마전 제주도 한라산에 첫 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공연히 반갑다. 비록 TV 보도를 통해 접하는 영상이지만 겨울의 정취가 물씬 전해진다. 한라산 윗세오름에는 5이상 눈이 내려 온통 은빛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눈이 내려앉은 나뭇가지마다 하얗게 핀 눈꽃이 가히 일품이다. 파란 하늘, 고운 햇살과 함께 어우러진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 풍경화가 따로 없다. 예상치 못한 눈을 만나 마냥 즐거워하는 등산객들의 표정이 상큼하고 밝아 보기가 더 좋다.


한라산만이 아니다. 아직 단풍이 고운 자태를 잃지 않은 산들이 수두룩한데 그 위로 눈이 덮인 곳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제 11월 하순에 접어들었 을 뿐인데. 가을이 곧 끝자락을 감출 때가 됐다고 막연히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달아나듯 훌쩍 떠나버리는 게 조금은 서운하게 느껴진다. 하긴 입동이 지난지가 언제인데, 겨울이 올 때도 됐다. 실제 깊은 산들은 이미 겨울 채비를 마친지 오래일 것이다. 어쩌면 올해는 조금 더디게 겨울이 온 것인지도 모른다. 한라산 첫 눈만 해도 예년보다 10일 이상 늦었다니 하는 말이다. 한라산 눈 소식을 접한 다음 날 기어이 서울 중부지역에도 제법 풍성하게 첫 눈이 내렸다. 이렇게 겨울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가는 가을이 아쉽기는 하나 사실은 오는 겨울이 더 반갑다. 사람마다 취향과 생각이 다 같을 수는 없을 것이나 겨울은 여간 매력적인 계절이 아니다. 101가지의 이유가 있지만 그래도 꼽으라면 아무래도 여유와 낭만이 아닐까 싶다.


겨울을 대표하는 오랜 아이콘은 이다. 전통 농경사회에서 겨울은 충분한 휴식을 통해 다가올 봄 농사철에 대비하는 시기로 활용됐다. 농사철이 시작되면 휴일과 쉼은 거의 없다. 그러기에 겨울에 한 숨 쉬어가며 내일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건 필수다. 상상만으로도 겨울은 푸근하고 여유롭다. 가 을걷이를 끝내고 곳간에 겨울을 날 양식이 어느 정도 쌓이면 마음도 풍성해 지게 마련이다. 저녁상을 물린 남자들은 삼삼오오 동네 사랑방에 모여 술추렴 사치를 부려보는 것도 겨울 휴식기라야 가능한 즐거움이다.


아이들에게도 겨울은 오진 재미가 있다. 당장 먹을 게 떨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신나는 판인데 연날리기, 얼음지치기, 눈밭 뛰놀기 등 손등이 터서 갈라질망정 놀 거리가 지천이다. 긴긴 겨울 밤, 배불리 저녁밥을 먹은 아이들이 곤하게 잠자는 모습에 흐뭇해하며, 부부간에 느긋하게 깊은 정을 나눌 수 있는 것도 이 때다.


때 아닌 겨울 예찬을 늘어놓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너무 과로에 시달리고 있어서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가 내놓은 삶의 질조사 결과를 보면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 수 있다. 우선 전체 순위가 OECD 38개 회원국들 중 29위다. 그나마 매 년 떨어지고 있다. 지난 201425위에서 201527, 지난해 28위 였다. 이런 추세라면 30위권 밖으로 밀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교역 규모가 1조 달러를 넘어서는 세계 12위 경제 강국이라고 자랑하지만 국민들의 삶은 팍팍하기 짝이 없다는 의미다.


항목별 순위를 보면 더 걱정스럽다. 주거(6), 교육(10)은 비교적 상위 권에 들어가 있지만 일과 삶의 균형은 35위로 사실상 꼴찌다. 죽어라 일만 하는 바람에 챙겨야 할 휴식과 건강, 가족 등 정작 중요한 것들은 뒷전이란 소리다. 실제 일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 연간 근로시간은 20002,512시간(32)에서 20162,069시간(31)으로 감소했으나 OECD 평균을 300시간 이상 초과하고 있다. 오죽 하면 정치인들이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저녁 있는 삶을 내세울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 사회가 일 중독에서 벗어날 조짐이 조금은 보인다는 사실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일과 가정 중에서 일을 더 중시한다는 응답이 처음으로 50% 아래로 내려갔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60%가 넘었다.


열심히 일해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 에 산업화를 일궈낸 건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쉬어가며 일을 할 때가 됐다. 젊은 직장인들이 고 임금보다 칼퇴를 더 선호하고 있다. 조금씩 세상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근로시간 단축에 나선 것도 이런 흐름을 읽었기 때문이다. 휴가와 휴식에 인색하지 않아야 더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따지고 보면 풍성한 가을의 결실은 농부의 겨울 휴식이 그 시작이다.


| 정재욱 건국가족 편집위원

건국대학교 사학과 78학번으로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마쳤다. 헤럴드 경제에서 정치부장과 증권부장, 사회부장 등을 거쳐, ‘기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편집국장과 논설실장 직을 역임했다. 현재 헤럴드경제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