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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학번의 새옹지마(塞翁之馬) 이야기 - 오성삼(농교 66‧인천 송도중고등학교 부이사장)
22.06.21 조회수 : 480
건대동문

1966년 대학 생활을 시작했던 내 또래의 동기생들이 어느새 70 중반을 넘어섰다. 이제 삶의 중심이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메멘토 모리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잠시 대학 시절로 돌아가면, 자취생들의 단골 메뉴였던 100g짜리 삼양라면 한 봉지가 20, 목로주점에서 떼창을 하며 마시던 진로소주 한 병은 65, 그리고 중국집 자장면 한 그릇이 100원 하던 시절이었다. 신입생 첫 학기 등록금 8만 원을 내고 10만 원 언저리에서 4년 졸업을 맞이했다.

 

그 시절 해마다 대학가에 입시 철이 다가오면, 나는 전년도에 출제된 문제들을 복사해 교문 앞에서 팔곤 했다. 입학원서를 사기 위해 오가는 수험생들이 내 고객이었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 시골 교회 등사기를 빌려 밤새 찍어낸 시험지를 교문 앞에서 팔던 장사는 제법 괜찮은 돈벌이가 되곤 했다. 3학년으로 올라가던 겨울방학. 교문 앞 장사꾼들이 늘어나면서 대학 정문의 수위들이 단속에 나섰다. 호루라기를 불어 재끼며 단속에 나선 수위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평소 까칠하던 수위가 교문 앞 잡상인을 단속한답시고 나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 발단이었다. 주먹질까지는 안 갔지만 심한 다툼이었다. 그로 인해 나는 돈벌이를 접어야 했다. 온기가 사라진 대학 건물 방송실에서 뒤척이며 잠을 청하던 그날 밤, 내게 떠오른 생각 하나가 있었다. 교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시험지 장사를 하며 보아 온 장면. 교수들이 교문을 지날 때마다 거수경례하는 수위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훗날 교수가 된다면, 오늘 다투던 그 수위의 거수경례를 받으며 출근하리란 비루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나의 결심에 비상벨이 울린 것은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ROTC 8기생 훈련을 마친 내가 장교임관 신체검사에서 늑막염 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로 인해 132명의 동기생 가운데 나 홀로 임관 대열에서 탈락하게 된 것이다. 세상이 멈춰버린 것 같던 그때를 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의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건강이 회복되자 이번에는 병무청으로부터 징집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대학 시절 함께 훈련받던 동기생들이 중위 계급장을 달고 전역을 앞둔 시점에 나는 신병훈련소에 입대해 34개월의 군 복무를 마쳐야 했다. 다행히 군종병으로 군 복무를 하게 되어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밤이면 본부중대 앞 탄약고 주변에 보초를 서곤 했는데, 어둠이 드리운 철조망 너머로 호루라기 불던 수위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기어코 교수의 꿈을 이루리라. 그래서 교문 앞을 지나며 그 수위의 거수경례를 받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3년 가까운 군 생활을 이어갔다.

 

19741128. 마침내 육군 병장 오 병장의 제대 날이 밝았다. 제대 신고를 마치니 제대비 5,000원을 지급해 주었다. 그날 서울에 도착해 예비군복 차림 그대로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학원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입학원서가 5,000. 그날 아침 군에서 받은 제대비 오천 원을 모두 털어 입학원서 한 장과 맞바꾼 날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원 공부를 끝내고 대학 강사 자리를 얻게 되었다. 경제적 쪼들림은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미국 유학의 길.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해외 입양하는 아동 5명을 에스코트해주는 대가로 비행기 표 한 장을 얻어 떠난 유학이었다. 눈보라 흩날리던 시카고 오헤어 공항만큼이나 을씨년스럽던 6년 반의 미국 유학 생활은 군 생활보다 절대 가볍지 않았다. 하늘은 내게 그간의 노력과 혹독한 고생의 대가를 풍성히 보상해주었다.

 

25년의 교수 생활, 나는 세 번의 교육대학원장을 역임했고 전국교육대학원장협의회 회장도 지냈다. 대학교육협의회에 파견되어 2주기 전국대학 평가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고, 공개채용을 통해 교육인적자원부의 고위직(2급 상당)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대학 시절 학교건물에서 잠을 자며 방송반 활동을 했던 나는 8년간이나 ‘KBS 객원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국비 해외 파견 교수로 미국대학을 다녀왔고, 사범대 교수 시절 건대부고 교장을 겸하게 되었다. 그때 취득한 중등학교 교장 자격증은 교수 정년을 맞이한 다음 날 100년의 역사를 지닌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 교장으로 취임해 인생 이모작을 시작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대학 시절 교문 앞 수위와의 다툼은 내게 대학교수의 꿈을 잉태시켜 주었고, ROTC 장교임관 탈락의 아픔은 대학원 진학의 계기를 열어주었다. 가난에 좌절하고 시들어 버릴 것만 같았던 벼랑 끝 막다른 선택 또한 미국 유학에 도전한 원동력이었음을 돌이켜 본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가 넘쳐나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