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교 법학과 설치역사와 발전과정
모교의 법학과는 그 전신인 낙원동 정치대학 때부터 설치되었다. 모교 설립자 상허 유석창 박사는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8.15해방 후 낙후되고 혼란스러운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여 낙원동에 정치대학을 설립하면서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이 자유민주공화국으로서 제대로 발전하려면 법치(法治) 확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법학과를 우선 설치하였다. 당시 낙원동 교사(校舍)는 현재 모교 캠퍼스로 옮겨와 박물관으로 쓰는 서북학회 건물인데, 비좁은 공간 사정에도 불구하고 지하에 ‘법학연구실’을 별도 설치하여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1951년 6.25동란 중에 실시된 고등고시 2회에 박규석 동문이 합격하여 모교 법조인 1호를 기록하였고, 그 이후 1963년 고등고시 16회까지 이상규, 황해진, 황계용, 김종표, 고영구 등 11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당시 1년에 회당 12~50명 정도만 합격시키던 시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성과이다. 더군다나 고시 10회에서는 전체 합격자 50명 중 황계용, 김종표, 황동준 등 3명이 합격하여 전국사립대학 중 1위의 합격자 배출이라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이어진 사법시험 제도 아래서 200여 명의 법조인을 배출하여 나름대로의 성과를 이어갔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처음부터 정원 30명의 소규모 과로 출범하여서 수백명 규모의 정원을 가진 타 대학에 수적 열세를 못 면하였고, 그에 따라 모교의 위상도 낮아져 한때 ‘삼국대’라고 불리는 수모도 피할 수 없었다.
법조인 배출경로의 개혁-로스쿨 제도의 도입
종전 고등고시 또는 사법시험 제도 아래서는 학력, 전공에 관계없이 누구나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면 응시자격을 부여하여 무학자, 초·중·고 졸업자 등도 응시할 수 있었다. 참고로 필자가 응시했던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상고를 졸업한 학력으로 사법시험에 응시하여 60명 중 1명의 합격자가 되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법조인 양성제도는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폐단이 지적되어, 1994년부터 새로운 법조인 양성제도의 도입이 논의되었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10월에 로스쿨법안이 정부안으로 국회에 제출되기에 이르렀다.
로스쿨 제도란 ‘법학전문대학원’이라는 대학원을 졸업한 자에게만 변호사자격시험 응시자격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로스쿨(Law School)’은 미국식 법학전문대학원을 지칭하는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법학전문대학원 대신 로스쿨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원칙적으로 4년제 대학을 졸업하여 학사학위를 가진 자만이 석사과정의 대학원에 진학이 가능한데,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자격은 그 전공이 법학이 아니어도 상관없고, 입학 시 법학 실력을 테스트하지도 않는다. 법학은 대학원 3년 과정에서 이수하고 졸업하면 법학전문석사 학위를 부여하는데, 이 석사학위를 딴 자만이 변호사자격시험에 응시하며 현재는 해마다 1,700여명의 합격자를 배출한다.
필자의 로스쿨제도 도입 활동
필자는 위 로스쿨 법안이 국회에 제출될 당시 모교의 법대학장직을 맡고 있었다. 이틈에 잠시 필자의 법조경력을 말씀드리자면, 1971년 모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졸업하는 해인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1980년 부산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2003년까지 서울지검 등 검사, 헌법재판 연구관, 법무부 과장, 서울중앙지검부장검사, 수원지검·춘천지검 차장검사, 서울고검 송부부장까지 지내고 2003년 국민대 법대교수, 2004년 모교 법대 교수, 법대학장, 행정대학원장을 거쳐 20018년 정년 퇴임하였고, 현재는 법무법인 대종의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필자가 로스쿨제도 도입 운동에 관여한 것은 위 정부법안에 대한 찬반논란이 전 사회적으로 심한 가운데, 필자가 전국법과대학장협의회장, 로스쿨비대위상임공동대표를 맡으면서부터이다. 로스쿨비대위는 한국법학교수회·전국법과대학장협의회·사법개혁시민단체가 연합하여 결성한 것인데, 정부법안은 ‘특권법조’ 기득권연장법안에 불과하니 국민위주 법률서비스 및 국제경쟁력 제고를 달성할 수 있는 ‘올바른 로스쿨법안’으로 수정하여 통과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2005년 10월부터 법안이 통과된 2007년 7월까지 1년 5개월 동안 시국선언, 단식농성, 대국민 호소와 국회의장, 여야대표, 조·중·동 등 주요언론의 주간 ,편집국장 방문 등 집요하고 끈질긴 활동을 전개하였다. 필자는 위 활동 외에도 개인적으로 조선일보 등 언론기고 9회, 신문·방송 인터뷰 42회 등 눈코뜰새없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였다.
조선·동아·MBC·SBS·YTN 등 주요언론이 고비 때마다 우리의 활동을 지원하는 사설, 기사를 게재하여 주었다. 잠잠하던 국민 여론도 관심표명과 지지로 바뀌었다. 그 결과 정부원안이 상당부분 수정되어 2007.7.3. 23:57 법사위 패싱 국회의장 직권상정으로 통과되었다.
오늘의 로스쿨제도는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모교의 로스쿨 유치와 학교발전
어렵게 통과된 로스쿨 법안에 따라 로스쿨 총정원은 2000명, 로스쿨 수는 25개로 한정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로스쿨 및 정원의 배정은 지방균형발전을 위하여 지방 우대, 수도권 엄격 심사의 방침을 발표하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이제는 특히 수도권에서 어느 대학이 로스쿨을 인가받을 수 있느냐에 사활이 걸린 게임을 하게 되었다. 첫째가 로스쿨인가 확보, 둘째가 가급적 많은 정원확보가 과제였다. 치열한 경쟁 끝에 모교는 수많은 경쟁대학을 물리치고 재경지역 로스쿨인가를 획득하게 되었고, 정원은 아쉽지만 40명을 배정받았다. 충주캠퍼스 의과대학 정원 40명과 묘하게 일치되었다. 당시 치열한 경쟁상황에서 학교의 위상과 역대 고등고시·사법시험 합격자수를 참작하여 정원 배정을 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최대정원은 150명, 최소정원은 40명이었는데, 서울에서는 서강대와 모교가 40명이었다.
로스쿨은,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백화점의 명품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일류백화점 여부의 판단 기준은 그 백화점에 유명브랜드가 입점해 있느냐에 여부에 따라 정해 지듯이 일류를 지향하는 대학에는 의과대학과 함께 로스쿨이 있느냐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모교가 로스쿨을 유치하게 됨에 따라 그 지긋지긋한 ‘삼국대학’이라는 말이 일시에 사라졌다. 이를 계기로 그 구성대학보다 확실히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우리 대학 로스쿨은 40명의 정원을 받았지만, 해마다 평균 30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여 올해 15회 합격자까지 합하면 15년 동안 합격자 수가 450명이 넘는다. 기존의 사법시험 등 합격자 200여명, 건국대 학부졸업 후 타대학 로스쿨졸업 합격자까지 합하면 800여명의 법조인을 배출한 것으로 추산된다. 머지않아 1,000명 법조인 배출이 달성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로스쿨이전 합격자 200여명과 로스쿨 합격자 450여명은 건국법조인동문회를 결성하여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초대 법조인 동문회장이 필자이고, 안철상 전 대법관이 2대 회장을 맡고 있다.
이제 사회적 영향력이 큰 법조인 1,000여명이 학교와 동문들을 지원하게 되면, 학교나 동문들에게도 큰 빽(?)이 될 것이다.
다행히 모교가 해를 거듭할수록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전국 10위권 명문대열에 진입하는 단계이다. 로스쿨의 발전이 모교의 발전의 버팀돌이 되기를 기원하며 이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