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 People
자랑스러운 건국인
순국선열유족회장 김시명(축산 66) 동문
17.11.29 조회수 : 311
건대동문

김시명.jpg

11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1939년 상해임시정부가 1121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정했다가 을사늑약 체결일인 1117일로 바꿔 지정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는 78번째 순국선열의 날을 맞이한 김시명 동문은 침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바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가 구분되어 이 둘에 관한 예우가 다른 까닭이다. 순국선열유족회장 김 동문과 함께 순국선열유족이 처한 아픈 현실을 들여다보았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 제4조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가 구분돼 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항일투쟁을 하다 1945815일 해방 전에 숨진 사람은 순국선열이고, 살아있던 사람은 애국지사다.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이 훨씬 더 의미 있고 숭고한 가치로 존경받아야 마땅하나, 해방 후 보훈정책은 죽은 순국선열보다 산 애국지사 위주로 이뤄졌다.


순국선열유족회장 김시명(축산 66) 동문은 국가보훈 기본법 제18조에는 국가보훈대상자에게 희생과 공헌의 정도에 상응하는 예우 및 지원을 한다고 명시돼 있다.”현실은 목숨을 버린 순국선열보다 살아서 귀국한 애국지사를 더 예우하고 지원하는 정책이 계속돼 왔다.”고 그간의 상황을 지적했다.


국가나 공공단체의 회의나 행사에서 제일 먼저 갖추는 격식인 국민의례는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행사 때마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지만, 정작 정부의 최고·공식 추념기관인 국립현충원에는 순국선열묘역이 없다. 순국선열 위패는 서대문 역사기념관 한쪽 188(56) ‘순국선열 현충사에 모셔져 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3525분의 순국선열을 인정했지만, 장소가 좁아 2,835분의 위패만 모셔져 있다. 운영 주체도 국가가 아닌, 연간 1천만 원의 정부 지원금으로 순국선열유족회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 실정이다.


국립현충원에 있어야 할 이 시설은 1995년에야 겨우 만들어졌다. 게다가 관리인을 고용할 예산이 없어 이 시설을 국민에게 개방하지 못했다. 2014년 김 동문이 사비로 사람을 채용해 순국선열의 위패를 모신 위패실을 개방했다.


“2013년에 부회장으로 와보니 기본적 시설 유지도 안 돼 빚만 7000만 원 가량 지고 있었지요. 순국선열의 날이라고 하지만 제사 지낼 돈이 없었습니다. 겨우 서울시와 행정안전부를 통해 2000만원을 지원받아 제사를 지내게 되었지요. 피우진 보훈처장이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예산을 좀 더 지원하기로 해 다행이지만 근본적으로 순국선열에 대한 예우가 바로잡혀야 합니다.”


광복의 공헌도와 희생도를 따지면 목숨을 버린 순국이상이 없다. 여러 법적 조항을 바탕으로 환산한 결과 순국선열은 애국지사보다 5배 이상 희생도와 공헌도를 가졌다. 그러나 2008년 예를 들면 애국지사는 476000만원이 넘는 돈을 지원한 반면 순국선열 지원은 16300만원에 불과했다.


이는 보훈처 지원이 애국지사 위주의 광복회를 통해 이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복회 총회에서 애국지사 유족 비율이 93.5%이고 순국선열은 6.5%에 불과하다보니 애국지사 위주의 보훈정책만 이루어진 것이지요. 류관순·윤봉길·안중근 등 유명 순국선열 19명은 별도 기념사업회로 지원할 뿐 나머지 3500명이 넘는 순국선열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1946년 경북 안동 출신인 김 동문의 증조부 김필락 선생(1873~1919)3·1운동이 일어난 1919321일 안동 천지시장에서 만세를 주동하고, 시위군중을 이끌고 천지주재소에서 일제경찰과 대치하다 총에 맞아 순국했다. 같이 행동대원으로 따라나선 조부는 경찰에 잡혀가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33세에 숨졌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듯이 증조부와 조부가 모두 순국한 김 동문의 집안이 다를리 없었다. 그는 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지만 진학을 포기했다가 뒤늦게 극빈자 전형으로 겨우 중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장학생으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모교에 입학,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어 활동하며 학군단(ROTC)으로 졸업하고, 이후 사업을 통해 어느 정도 생활의 터전을 마련한 다음 순국선열유족회에 가입했다. 2013년 순국선열유족회에서 이사로 참여해 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받은 것도 후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 동문은 혼자의 노력으로 교육도 받고 자수성가했지만 순국열사 후손 대부분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많이 배우지 못한 순국선열 후손들은 잘못된 보훈정책을 바로잡을 최소한의 권리 주장도 하지 못해 현재에 이르렀다.


순국선열 위패를 모신 서대문 순국선열 현충사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도 부쩍 늘어났다. 2014년 처음 개관했을 때 한 해 참배객이 1600명 정도였지만, 지금은 3000명 가까이 된다. 요즘에는 주변 안산을 돌면서 태극기도 만들어 보는 순국선열 따라 걷기등 다양한 행사가 초등학생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온갖 고통을 감내하고 마침내 목숨까지 바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뜻과 희생정신에 걸맞은 예우가 갖춰지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는 것, 그들이 지켜낸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의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