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철인’ 이영표, 클래스는 영원하다
“도대체 왜 저런 선수가 사우디에서 뛰는 거야?” 코트디부아르·스페인 등 강팀과의 평가전에서 한국의 왼쪽 수비수는 ‘영리’했고 또 ‘견고’했다. 여전히 유럽에서 뛰어도 손색없는 실력이었다.
월드컵 16강 길목을 앞두고 맞붙은 나이지리아는 줄기차게 한국 수비진의 오른쪽을 괴롭혔다. 왼쪽보다는 오른쪽이 훨씬 뚫기가 쉬웠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많은 기회를 오른쪽에서 만들었다. 보통 ‘벽’이라고 불리는 수비수는 피지컬이 좋다. 그러나 한국의 왼쪽 수비수 이영표(정외 96·알힐랄)는 작은 키(1백76cm)로도 ‘벽표’로 불린다.
이영표는 K리그 안양 LG(현 FC 서울)를 시작으로 네덜란드(PSV 아인트호벤), 잉글랜드(토트넘 핫스퍼), 독일(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을 거쳐 지금은 사우디아라비아(알힐랄)에서 뛰고 있다. 사우디 리그로 갔다고 해서 그의 실력이 퇴보했다고 보는 것은 편견이다.
억측에 불과하다는 것을 월드컵에서 증명했다. 그는 알힐랄에서 가장 사랑받는 선수이며, 수년 동안 알힐랄의 골칫거리였던 오른쪽 수비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준 선수이다. 2009-2010년 팬 인기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이슬람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랑받는 기독교인이다. 알힐랄 팬들은 매번 그를 위해 경기장에 태극기를 들고 나온다.
그가 처음 태극 마크를 달 기회를 잡은 때는 1999년 2월, 건국대 재학 시절이었다. 그것도 테스트용 선수였다. 당시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올림픽 대표팀은 부족한 윙백 자원을 테스트할 요량으로 그를 불렀다. 명지대를 상대로 한 연습 게임 전반전, 이영표의 패스 미스는 바로 실점으로 연결되었고, 1-0으로 뒤진 채 하프타임을 맞았다.
첫 기회가 그대로 물거품이 되는 듯했지만 후반전에도 출장 기회를 잡은 이영표는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장기인 드리블을 선보이며 골까지 기록했고, 사로잡힌 허심(許心)은 이영표에게 정식으로 빨간 유니폼을 선물했다.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도 겸하고 있던 허감독은 그를 국가대표팀으로 끌어올렸다. 1999년 6월12일 서울 잠실운동장에서 열린 멕시코와의 코리아컵 경기는 이영표의 A매치 데뷔전이었다.
이 새내기는 ‘헛다리 짚기’를 하며 관중들을 열광시켰고, 기민하게 움직이며 볼을 따냈다. 공격수를 반칙으로 끊거나 볼을 뺏더라도 앞으로 뻥 내지르는 수비수만 보던 축구팬들은 드리블로 치고 나가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수비수, 볼을 미리 끊어내 정확한 패스로 공격을 전개하는 수비수를 보게 되었다.
도르트문트의 미드필더 플로리안 크링에는 이영표를 이렇게 평가한다. “이영표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필립 람(현 독일 대표팀 주장·좌우 모두 소화 가능한 풀백으로 이영표와 체구가 비슷하다)을 연상시키는 선수이다. 람보다 조금 나이가 많을 뿐이다. 수비 라인의 문제에서도 의사소통을 중요하게 여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의사소통으로 수비진을 조율하는 이영표의 ‘가치’는 월드컵을 전후로 빛을 발했다.
한국 국가대표 수비진은 무적 함대 스페인의 공격을 상대로 1실점만 하며 막아냈다. 아르헨티나전 4실점을 제외한다면 월드컵에서도 당초의 우려보다는 견고하게 버텼다. 나머지 젊은 수비수들은 하나같이 “영표형이 이렇게 말했어요”라고 말한다. 스페인과의 평가전이 끝난 뒤 이정수는 “영표형이 경기 전 ‘미드필드와 수비진의 간격을 좁혀 밀도 있는 플레이를 펼치자’라고 주문했는데 100% 이행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월드컵 그리스전에서 2-0 승리를 거둔 뒤 조용형은 “영표형이 경험이 많아 수비수들이 자신감과 믿음이 생겼다. 소통이 잘 되었다”라고 밝혔다.
2005년부터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 핫스퍼의 유니폼을 입었지만 “이영표는 유럽에서 몇 안 되는 준수한 왼쪽 수비수이다”라며 든든히 뒤를 봐준 마틴 욜 감독이 경질되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후임 후안데 라모스 감독 체제에서는 벤치를 지키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그를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영입한 것도 이영표의 ‘경험’과 ‘존재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월드컵과 UEFA 챔피언스리그를 거치며 쌓은 관록은 젊은 도르트문트 수비진을 이끄는 데 제격이었다. 독일 언론들도 이영표가 도르트문트 팀에 합류한 뒤 수비진이 안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토트넘 시절 두 번이나 어긋난 이탈리아 명문 구단 AS 로마의 영입설이 최근 다시 불거질 정도로 이영표의 가치는 높다. 지난 2006년 8월, AS 로마가 처음 영입을 시도했지만 계약 직전 단계에서 이영표가 거절하며 무산된 바 있다. 그는 “안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가 밀려들었다”라며 종교적 목소리에 귀 기울여 거절했음을 스스로 책을 통해 밝힌 바 있다.
AS 로마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했을 법한데도 33세의 선수를 여전히 원한다는 사실에 우리 축구팬들은 뿌듯해하고 있다.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축구계 격언이 비단 외국 유명 선수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을 이영표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