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도시락을 싸간 적이 없었다. 소풍을 가본 적도 없다. 아버지는 서울 삼양동 달동네의 개척교회 목사. 여덟 살 때부터 어머니의 권유로 교회 수요예배 풍금 반주자가 되었다. 풍금을 치면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당돌한 꿈을 키웠다. 중학교 때 동네 피아노학원에 처음 등록했다. 피아노학원에서 바이엘 87번을 처음 쳐봤다. 그 곡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너무도 아름답고 자유로워서.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음악공부를 하고 싶었다. 무턱대고 음악대학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는 말했다. “잘하기는 하는데, 너무 늦었다.” 늦게 시작해 건국대 음대에 들어갔다. 대학 졸업 후 1984년 단돈 200달러를 가지고 미국 유학을 떠난다.
예일대 음악대학원 교수 겸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인 함신익(53)의 젊은날의 초상(肖像)이다. 빈털터리였기에 애초부터 잃을 게 없었다. 미국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일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고학(苦學)으로 라이스 대학과 이스트먼 음대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예일대 부교수 9년을 거쳐 현재 예일대 음악대학원 정교수로 7년째 재직하면서 대학원생 중심의 ‘예일 필하모니아’를 이끌고 있다.
기자가 ‘지휘자 함신익’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전시향 상임지휘자(2001~ 2006)로 임명되었을 때였다. 그는 존재감이 없던 대전시향에 엄청난 변화와 혁신을 가져온 인물이었다. 지휘자가 청바지를 입고 지휘대에 섰고, 오케스트라 단원 전체가 축구 유니폼을 입고 출연하기도 했다. 청중의 반응은 연속 매진으로 폭발했고 기립박수는 공연 때마다 이어졌다. 이후 많은 별명이 그의 이름 앞에 붙었다. ‘오케스트라 부흥사’ ‘지휘봉을 든 혁명가’ ‘음악계의 엔돌핀’ 등.
지난 3월, 함신익 교수가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내정되었다. KBS교향악단은 2004년 러시아 지휘자 드미트리 키타옌코가 떠난 뒤 6년이나 상임지휘자 공석 상태였다. 단원만 있고 담임 교사가 없는 상태를 김인규 KBS사장은 계속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자 교향악단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내부 반발이 진정되는 데는 거의 5개월이 필요했다.
내부 반발의 핵심은 그가 음악계의 비주류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한국 음악계의 주류인 서울대 음대나 연세대 음대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거부감을 표시한 이들이 대놓고 학벌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김인규 KBS사장은 음악계의 비주류인 그를 실력만 보고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임명했다.
인터뷰 약속은 지난 8월 3일 KBS본관 3층 상임지휘자실로 잡혔다. 8월 3일 오전 9시45분, 기자와 사진기자가 1층 접수대에 도착했다. 방문신청서를 쓰고 들어가려는데, 여직원이 “카메라를 동반할 경우에는 사전에 홍보실에 통보를 해야 한다”며 출입을 막았다. 인터뷰 취재에 사진기자가 동행하는 것은 상식인데, 왜 그게 홍보실을 통해야 할 사항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순간, KBS에 만연해 있다는 관료주의 냄새가 훅 하고 끼쳤다. 방침이 그렇다는데, 직원의 지시에 따르는 수밖에.
결국 장소를 KBS본관 밖의 커피숍으로 바꿔야 했다. KBS본관 3층의 상임지휘자실 분위기를 독자들에게 전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가 커피숍에 먼저 도착해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악수를 하고 인사를 건넸다.
“얼굴에서 고생한 흔적을 찾기가 어렵네요?”
“그래요? (고생한 게) 안 나타나요? 그럼 고생 안한 거네?(웃음)”
그는 미국 유학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서 해결했다. 하긴 개척교회 목사가 무슨 돈이 있어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줄 수 있겠는가. 돈을 벌기 위해 식당에서 시간당 2달러를 받고 웨이터로 일했다. 이어 수입이 좋은 냉동트럭 운전사로도 일했다. 뒤이어 지압사도 해봤다. 하루 하루를 벼랑 끝에 선 채 그는 유학생이 경험할 수 있는 밑바닥 직업은 다 경험했다.
“나는 그걸 고생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당연히 거쳐야 할 한 과정이었지.”
“지독하게 고생하면서도 예술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함 교수는 대답 대신 시원하게 웃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Marslow)가 제시한 인간 욕구의 5단계 법칙에 따르면 최상위에 있는 게 자아실현욕구다. 인간은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사회적 욕구, 자존의 욕구를 차례대로 추구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예술적 활동이 자아실현욕구의 대표적 형태다. 예술가는 먹고사는 문제, 즉 생리적 욕구가 해결이 안된 상태에서도 최상위 단계인 자아실현욕구를 추구하는 직업이다.
아주 기초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음악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음악은 영혼의 비타민입니다. 인간의 몸은 여러 종류의 비타민을 골고루 필요로 합니다. 그중 하나가 결핍되면 금방 증상이 나타납니다. 음악은 영혼을 위로하고 활력을 주는 고농도의 비타민입니다. 두 번째 음악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과 혁신성을 넓혀줍니다. 미국에서 로스쿨 입학 때 음악대학원을 나온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이유입니다. 정서적 안정이 결핍된 사람들은 음악을 안 듣기 때문이라고 보면 됩니다. 자기 얘기만 하는 경향이 있는 정치인들은 2시간 동안 청중의 입장에서 객석에 앉아 있어봐야 합니다. 음악을 들으며 온갖 상상을 하고 감정변화의 기복을 느껴볼 필요가 있지요. 음악은 생각의 영역을 넓혀줍니다.”
그는 이어 세 번째 설명을 했다.
“인간 자체가 음악을 하도록 태어났지요. 누구나 작곡을 할 수 있는데 작곡을 안할 뿐이죠. 우리가 왜 음악회에 갑니까? 음악회에 다녀오면 감성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음악적인 요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회복할 때 사람은 평안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곤 그는 기자에게 되물었다.
“음악보다 뛰어난 게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기자가 잠시 머뭇거렸다.
“자연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산이 기가 막혀요. 북한산, 설악산, 대둔산, 계룡산….”
교향악단에서 지휘자는 왜 필요한 겁니까? 연주자들이 악보에 따라 각자 연주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음,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단원들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로 만드는 겁니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지휘봉 끝에서 지휘가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웃음)”
지휘가 지휘봉 끝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안 게 언제입니까. “불과 3년 전입니다.”
그러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무엇을 봅니까. “지휘자는 첫 연습 때 지휘자를 다 보여줘야 합니다. 실제 연주 때는 지휘자를 보기가 어려워요. 연주자들이 각기 서로를 잘 듣도록 해주는 게 지휘자의 역할이지요. 이런 것은 연습과정에서 이뤄집니다. 그러기 위해선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지휘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휘자가 보는 총보(score)를 공부해야 합니다. 예일대 음악대학원에서는 모든 단원에게 총보를 공부하게 하고 있지요. 제가 대전시향을 지휘할 때도 총보를 보게 했어요.”
미국 줄리아드 음대 같은 명문 음대의 경우 한국 유학생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줄리아드 음대에 입학하려면 적어도 20년 이상 음악을 해야 한다. 여기에는 집안의 어마어마한 경제적 뒷받침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음악 공부는 돈 있는 집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정설(定說)이 성립된다. 하지만 함신익 상임지휘자는 돈 없는 집안에서 음악을 공부해 성공한 경우다.
인터뷰 약속은 지난 8월 3일 KBS본관 3층 상임지휘자실로 잡혔다. 8월 3일 오전 9시45분, 기자와 사진기자가 1층 접수대에 도착했다. 방문신청서를 쓰고 들어가려는데, 여직원이 “카메라를 동반할 경우에는 사전에 홍보실에 통보를 해야 한다”며 출입을 막았다. 인터뷰 취재에 사진기자가 동행하는 것은 상식인데, 왜 그게 홍보실을 통해야 할 사항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순간, KBS에 만연해 있다는 관료주의 냄새가 훅 하고 끼쳤다. 방침이 그렇다는데, 직원의 지시에 따르는 수밖에.
결국 장소를 KBS본관 밖의 커피숍으로 바꿔야 했다. KBS본관 3층의 상임지휘자실 분위기를 독자들에게 전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가 커피숍에 먼저 도착해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악수를 하고 인사를 건넸다.
“얼굴에서 고생한 흔적을 찾기가 어렵네요?”
“그래요? (고생한 게) 안 나타나요? 그럼 고생 안한 거네?(웃음)”
그는 미국 유학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서 해결했다. 하긴 개척교회 목사가 무슨 돈이 있어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줄 수 있겠는가. 돈을 벌기 위해 식당에서 시간당 2달러를 받고 웨이터로 일했다. 이어 수입이 좋은 냉동트럭 운전사로도 일했다. 뒤이어 지압사도 해봤다. 하루 하루를 벼랑 끝에 선 채 그는 유학생이 경험할 수 있는 밑바닥 직업은 다 경험했다.
“나는 그걸 고생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당연히 거쳐야 할 한 과정이었지.”
“지독하게 고생하면서도 예술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함 교수는 대답 대신 시원하게 웃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Marslow)가 제시한 인간 욕구의 5단계 법칙에 따르면 최상위에 있는 게 자아실현욕구다. 인간은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사회적 욕구, 자존의 욕구를 차례대로 추구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예술적 활동이 자아실현욕구의 대표적 형태다. 예술가는 먹고사는 문제, 즉 생리적 욕구가 해결이 안된 상태에서도 최상위 단계인 자아실현욕구를 추구하는 직업이다.
아주 기초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음악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음악은 영혼의 비타민입니다. 인간의 몸은 여러 종류의 비타민을 골고루 필요로 합니다. 그중 하나가 결핍되면 금방 증상이 나타납니다. 음악은 영혼을 위로하고 활력을 주는 고농도의 비타민입니다. 두 번째 음악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력과 혁신성을 넓혀줍니다. 미국에서 로스쿨 입학 때 음악대학원을 나온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이유입니다. 정서적 안정이 결핍된 사람들은 음악을 안 듣기 때문이라고 보면 됩니다. 자기 얘기만 하는 경향이 있는 정치인들은 2시간 동안 청중의 입장에서 객석에 앉아 있어봐야 합니다. 음악을 들으며 온갖 상상을 하고 감정변화의 기복을 느껴볼 필요가 있지요. 음악은 생각의 영역을 넓혀줍니다.”
그는 이어 세 번째 설명을 했다.
“인간 자체가 음악을 하도록 태어났지요. 누구나 작곡을 할 수 있는데 작곡을 안할 뿐이죠. 우리가 왜 음악회에 갑니까? 음악회에 다녀오면 감성이 회복되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음악적인 요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회복할 때 사람은 평안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곤 그는 기자에게 되물었다.
“음악보다 뛰어난 게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기자가 잠시 머뭇거렸다.
“자연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산이 기가 막혀요. 북한산, 설악산, 대둔산, 계룡산….”
교향악단에서 지휘자는 왜 필요한 겁니까? 연주자들이 악보에 따라 각자 연주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음,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단원들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로 만드는 겁니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지휘봉 끝에서 지휘가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웃음)”
지휘가 지휘봉 끝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안 게 언제입니까. “불과 3년 전입니다.”
그러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무엇을 봅니까. “지휘자는 첫 연습 때 지휘자를 다 보여줘야 합니다. 실제 연주 때는 지휘자를 보기가 어려워요. 연주자들이 각기 서로를 잘 듣도록 해주는 게 지휘자의 역할이지요. 이런 것은 연습과정에서 이뤄집니다. 그러기 위해선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지휘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휘자가 보는 총보(score)를 공부해야 합니다. 예일대 음악대학원에서는 모든 단원에게 총보를 공부하게 하고 있지요. 제가 대전시향을 지휘할 때도 총보를 보게 했어요.”
미국 줄리아드 음대 같은 명문 음대의 경우 한국 유학생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줄리아드 음대에 입학하려면 적어도 20년 이상 음악을 해야 한다. 여기에는 집안의 어마어마한 경제적 뒷받침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음악 공부는 돈 있는 집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정설(定說)이 성립된다. 하지만 함신익 상임지휘자는 돈 없는 집안에서 음악을 공부해 성공한 경우다.
음악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도 결국 인생의 경험을 반영하는 건데,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친구들은 그런 점에서 한계가 있지 않나요. “제가 볼 때 그런 사람들은 삶의 패턴이 얼마나 똑같은지 몰라요. 자기들은 다르다고 하겠지만. 온실 안에서 재배한 딸기가 맛이 있겠어요? 양평의 산골짜기에서 키운 딸기가 맛있지. 남을 감동시키고 설득하는 표현에서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친구들은 무조건 안 틀리고 규격에 맞아야 한다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음악으로 청중을 감동시키고 설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생각해보세요. 음악회에 온 청중 중에는 내일 (회사에서) 잘릴지도 모르는 월급쟁이들이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연주자는 이들이 생존경쟁에서 느끼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표현해야만 비로소 전달될 수 있어요. 자신이 120%를 표현해도 청중은 50%밖에 전달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삶의 경험이 다양할 필요가 있어요. 어려움이 닥치면 스스로 뚫고 나가야 합니다. 지름길만을 찾다보면 결국엔 장벽에 막히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음악계에는 지름길을 추구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오래 걸리더라도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헤쳐나가는 게 표현을 풍부하게 합니다. 벽에다 머리를 부딪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음악을 들었을 때 저 타악기가 내 심정을 표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합니다.”
그가 만일 풍요로운 환경에서 음악을 했다면 지금과 같은 ‘개성 있는 지휘자 함신익’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적 천재의 삶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처절한 삶과의 투쟁 속에서 위대한 결정체를 남겼다. 볼프강 모차르트가 그랬고 루드비히 베토벤이 그랬고 구스타브 말러가 그랬다. 함씨는 자신에게 주어졌던 음악적 환경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나는 다만 다른 환경에서 음악을 했을 뿐입니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음악을 하겠다고 했으니 한국적 관념으로 볼 때는 늦게 시작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음악을 일찍 시작한 아이들이 피아노학원에 다닐 때 잠자리 잡고 가재 잡고 몰래 무 서리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이것은 음악적 상상력을 꽃피우는 데 매우 유익한 활동이었어요.”
음악대학을 나와 유학까지 다녀오고서도 직업을 못 잡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다른 분야에 비해 취업률이 매우 낮은 건 사실입니다. 미국이나 유럽도 마찬가지예요. 쏟아넣은 정력, 투자, 노력에 비해 음악 분야의 취업률은 평범한 전공을 한 사람보다 낮습니다. 설령 음악 분야에서 일을 한다 해도 만족도가 떨어집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목표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학생들은 모두가 백건우나 정경화나 정명훈이 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외국 학생들은 일류 음악오케스트라에 못 들어가더라도 동네오케스트라부터 기꺼이 시작합니다.”
함씨는 예일대에서 9년을 가르쳤고, 현재 예일 음악대학원 지휘전공을 7년째 가르치고 있다. 예일대에서만 교수임용 테스트를 두 번 거친 사람이다. 예일대 학부에서 9년을 가르친 경력이 있었지만 특별한 혜택은 없었다.
미국의 예일대 교수가 될 때 예일대 측이 가장 중시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나의 열정을 봤습니다. ‘신익다운 신익’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학점을 물어본 사람도,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고 물어본 사람도 미국에서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나도 학생을 뽑을 때 맨 나중에 학점을 보고 그 다음에 학교를 보게 되었죠.”
미국에서도 줄리아드 음대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중요합니까. “중요하죠. 줄리아드 음대는 솔로풍(風)을 만들어내는 학풍이 있습니다. 대학이 뉴욕 안에 있고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가르치기 때문에 졸업 후에 뉴욕에서 바로 활동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줄리아드 음대를 나와 식당에서 웨이터를 하면서도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곳이 뉴욕이니까요.”
함씨는 이스트먼 음악대학에서 지휘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스트먼 음악대학은 지휘자 과정으로 미국 내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학교다. 아직까지 박사학위는 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누구도 박사학위를 받았냐고 물어본 사람은 없다.
음악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이스트먼 음악학교 재학 당시 ‘깁스오케스트라’를 창단해 4년간(1988~1922) 이끌어봤습니다. 제 개인 오케스트라였죠. 오케스트라 지휘를 통해 오케스트라 운영 노하우, 지휘자의 리더십 등을 배웠죠. 그게 나의 선생입니다. 그때 오케스트라 멤버로 있던 사람들은 서울대 음대 교수, 시카고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단원 등으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1992년 1월까지 한국 음악계는 함신익이라는 존재를 거의 알지 못했다. 함씨는 1991년 폴란드의 휘텔버그국제지휘콩쿠르에서 2위로 입상하며 세계 지휘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어 1995년 한국인 최초로 예일대 교수가 되었다. 실력을 인정받으며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에서 객원지휘자로 잇달아 초청되었다.
함씨의 KBS교향악단과의 인연은 오래되었다. 1992년 지휘하기로 예정됐던 오트마 마가가 유럽에서 쓰러졌다. 함씨는 한 달 전에 대타로 통보받았고 객원지휘자로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지휘했다.
이번에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그가 추천되자 반발하는 쪽에서는 별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예일대 교수가 아니다’ ‘대전시향에서 개판치고 나왔다’ 등…. 함씨는 “예일대 홈페이지에 들어가 Shinik-Hahm을 치면 다 나오는데, 어이가 없지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 이어 “학벌은 모든 경력을 무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지만 이제는 그게 안 통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말했다.
함씨는 2008년 ‘예일대 명물교수 함토벤’(김영사)이라는 자서전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겪은 학벌사회에 대해 이렇게 역설했다.
“학벌은 인생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어느 곳에 가든 얼마나 큰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가가 중요하며, 학교가 나에게 필요한 양분을 주고 내가 그 안에서 양껏 자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자신에게는 최고의 일류학교다. 반면 남들이 아무리 일류학교로 꼽아도 내가 그 안에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면 3류, 4류가 되는 것이다.”
방송국은 최첨단의 창의적인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집단이다. KBS는 노조 눈치를 보는 방만한 경영과 관료적 문화로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가운데 김인규 사장이 함신익을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임명한 사실은 여러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다. KBS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상임지휘자로 15주 이상 머물며 티켓 마케팅부터 프로그램 구성까지 모든 것을 관장한다. 함씨는 KBS교향악단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가장 먼저 음악이 앞서야 합니다. 인간관계와 학벌이 앞서는 게 아니라. 음악을 제대로 했고 감동을 줬느냐로 평가해주었으면 합니다. 제 뒤에는 저를 바라보는 수많은 후배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신세 진 사람도 없으니 선후배를 배려할 필요도 없고 너무나 자유롭습니다. 오로지 음악과 감동만 생각하면 되니까요.”
거대한 관료조직 KBS는 지금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세계무대의 흐름을 아는 지휘자를 영입했으니. 오케스트라 단원이 연습에 쏟는 3시간은 평범한 직장인의 8시간과 차원이 다르다. 관련 실무자들이 적어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왜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지 않지요?”라는 식의 반응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