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럽지 않냐구요? '똥 박사'란 수식어가 자랑스럽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똥 박사’로 통하는 박완철(농학 74·한국과학기술원(KIST) 책임연구원) 동문.
그의 인생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어찌 보면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자양분이기도 했다.
소와 함께한 어린 시절
경북 상주시 사벌면 원흥리. 그는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번기에는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항상 일손이 부족했지요”
그는 7살 때부터 소고삐를 쥐고 풀을 뜯기러 다녔다.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쇠죽을 끓이는 것 역시 그의 몫이 됐다. 겨울에는 볏짚을, 여름에는 보리짚을 땔감으로 썼다.
“볏짚은 그나마 별 어려움이 없었어요. 하지만 매년 초가지붕을 갈고 난 묵은 볏짚을 사용할 때면 화력은 약한데 연기만 많이 나 눈물콧물 범벅이 되기도 했지요”
하루는 소죽을 끓이기가 힘들어서 아궁이에 불을 붙이는 흉내만 내고 물이 따뜻해지기도 전에 짚을 넣어 소여물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 소 입맛이 여간 까다로워야죠. 여물을 입에 대지도 않더군요. 덕분에 아버지께 된통 혼이 났습니다”
이렇듯 그의 어린 시절은 온통 소와 관련된 기억뿐이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10년 가까이 함께한 소를 팔러가던 날. 그도 울고 소도 울었다.
“아직도 가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소의 눈망울이 떠오르곤 합니다. ‘워낭소리’라는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옛 생각에 영화관을 찾기도 했었지요”
상주농잠고등전문학교에 진학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주농잠고등전문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과정 3년에 전문대 과정 2년을 포함해 5년제인 상주농잠고등전문학교는 농업 전문기능인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장남인 그가 출퇴근을 하면서 농사도 질 수 있는 ‘면서기’가 되길 바라셨다.
그러나 상주농잠고등전문학교에서의 생활은 그가 생각한 학교생활과는 괴리가 있었다.
“입학하자마자 삽과 호미, 낫과 괭이를 주더군요. 정규과목 6시간 중 4시간이 실습시간이었고, 영어나 수학 등의 과목은 일주일에 1~2시간뿐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4시간을 학교 실습장에서 논을 맸다. 집에 돌아와서도 집안일을 도와 논을 매야했다. 학교수업이 집안일이요, 집안일이 곧 학교수업이었다. 방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보충수업이랍시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 무논에서 2시간씩 풀을 뽑았다.
한번은 지칠 대로 지쳐 아이스크림이나 먹자고 친구들과 빵집에 갔는데, 여기서 서울로 유학을 간 중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서울 유명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더군요. 친구는 학교에서 공부를 배우고, 나는 논에서 풀이나 뽑고 있으니......”
그는 용기를 내 아버지께 다시 다른 고등학교에 입학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요지부동이었기에 결국 억지로 학교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힘든 시기였죠. 희망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인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농약 사고로 서울행 결심
어릴 때부터 농사라면 지긋지긋했지만 어쩔 수 없이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온 상주농잠고등전문학교는 5년제 전문학교이기 때문에 농과대학으로 편입할 경우에는 3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선 고등학교부터 다시 다니던지 검정고시를 치러야 했다.
억울했지만, ‘면서기’는 되기 싫었다.
그가 농사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일 1970년도 중반. 그 무렵 제초제가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똑같은 식물인데 벼를 제외한 나머지 잡초만 선택적으로 제거해주는 ‘제초제’는 김매기에 지친 농민들에게 선풍적인 관심을 끌었다.
하루는 큰아버지께서 그를 찾아와 어떤 농약을 사용하면 좋을지 자문을 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농업에 대해 제대로 배운 조카에게 물으셨던 것이다.
그는 당시 라디오에서 대대적으로 광고했던! '파무콘'이라는 제품을 권해드렸고, 다른 마을어른들도 그가 추천한 제품을 논에 뿌렸다.
그러나 다음날 대형참사가 터지고 말았다.
농약을 살포한 논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벼는 끝부터 타들어가고 있었고, 붕어며 개구리며, 온갖 생물이 허연 배를 보이고 둥둥 떠다녔다. 온 논에는 썩은 내가 진동했다.
일 년 농사를 그 때문에 망쳤다는 자책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농약회사에 따졌지만 ‘용량을 많이 써서 그런 것 아니냐”는 답변밖에 들을 수 없었다.
고향에 계속 있을 수 없어 도망치다시피 서울에 올라와 건국대 농과대학에 편입했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저는 계속 농사를 지었겠지요. 돌아보면 제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됐으니 행운이라고 봐야지요”
소와 함께한 어린 시절
경북 상주시 사벌면 원흥리. 그는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번기에는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항상 일손이 부족했지요”
그는 7살 때부터 소고삐를 쥐고 풀을 뜯기러 다녔다.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쇠죽을 끓이는 것 역시 그의 몫이 됐다. 겨울에는 볏짚을, 여름에는 보리짚을 땔감으로 썼다.
“볏짚은 그나마 별 어려움이 없었어요. 하지만 매년 초가지붕을 갈고 난 묵은 볏짚을 사용할 때면 화력은 약한데 연기만 많이 나 눈물콧물 범벅이 되기도 했지요”
하루는 소죽을 끓이기가 힘들어서 아궁이에 불을 붙이는 흉내만 내고 물이 따뜻해지기도 전에 짚을 넣어 소여물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 소 입맛이 여간 까다로워야죠. 여물을 입에 대지도 않더군요. 덕분에 아버지께 된통 혼이 났습니다”
이렇듯 그의 어린 시절은 온통 소와 관련된 기억뿐이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10년 가까이 함께한 소를 팔러가던 날. 그도 울고 소도 울었다.
“아직도 가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소의 눈망울이 떠오르곤 합니다. ‘워낭소리’라는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옛 생각에 영화관을 찾기도 했었지요”
상주농잠고등전문학교에 진학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주농잠고등전문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과정 3년에 전문대 과정 2년을 포함해 5년제인 상주농잠고등전문학교는 농업 전문기능인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장남인 그가 출퇴근을 하면서 농사도 질 수 있는 ‘면서기’가 되길 바라셨다.
그러나 상주농잠고등전문학교에서의 생활은 그가 생각한 학교생활과는 괴리가 있었다.
“입학하자마자 삽과 호미, 낫과 괭이를 주더군요. 정규과목 6시간 중 4시간이 실습시간이었고, 영어나 수학 등의 과목은 일주일에 1~2시간뿐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4시간을 학교 실습장에서 논을 맸다. 집에 돌아와서도 집안일을 도와 논을 매야했다. 학교수업이 집안일이요, 집안일이 곧 학교수업이었다. 방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보충수업이랍시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 무논에서 2시간씩 풀을 뽑았다.
한번은 지칠 대로 지쳐 아이스크림이나 먹자고 친구들과 빵집에 갔는데, 여기서 서울로 유학을 간 중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서울 유명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더군요. 친구는 학교에서 공부를 배우고, 나는 논에서 풀이나 뽑고 있으니......”
그는 용기를 내 아버지께 다시 다른 고등학교에 입학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요지부동이었기에 결국 억지로 학교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힘든 시기였죠. 희망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인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농약 사고로 서울행 결심
어릴 때부터 농사라면 지긋지긋했지만 어쩔 수 없이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온 상주농잠고등전문학교는 5년제 전문학교이기 때문에 농과대학으로 편입할 경우에는 3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선 고등학교부터 다시 다니던지 검정고시를 치러야 했다.
억울했지만, ‘면서기’는 되기 싫었다.
그가 농사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일 1970년도 중반. 그 무렵 제초제가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똑같은 식물인데 벼를 제외한 나머지 잡초만 선택적으로 제거해주는 ‘제초제’는 김매기에 지친 농민들에게 선풍적인 관심을 끌었다.
하루는 큰아버지께서 그를 찾아와 어떤 농약을 사용하면 좋을지 자문을 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농업에 대해 제대로 배운 조카에게 물으셨던 것이다.
그는 당시 라디오에서 대대적으로 광고했던! '파무콘'이라는 제품을 권해드렸고, 다른 마을어른들도 그가 추천한 제품을 논에 뿌렸다.
그러나 다음날 대형참사가 터지고 말았다.
농약을 살포한 논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벼는 끝부터 타들어가고 있었고, 붕어며 개구리며, 온갖 생물이 허연 배를 보이고 둥둥 떠다녔다. 온 논에는 썩은 내가 진동했다.
일 년 농사를 그 때문에 망쳤다는 자책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농약회사에 따졌지만 ‘용량을 많이 써서 그런 것 아니냐”는 답변밖에 들을 수 없었다.
고향에 계속 있을 수 없어 도망치다시피 서울에 올라와 건국대 농과대학에 편입했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저는 계속 농사를 지었겠지요. 돌아보면 제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됐으니 행운이라고 봐야지요”
KIST 연구원으로 입사
81년도엔 한국과학기술원(KIST) 환경연구센터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KIST에는 농학 출신이 필요할 까닭이 없지만, 당시 ‘공단의 오염물질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진행 중이었고, 이례적으로 농학 출신인 그가 입사하게 됐다.
그러던 중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86년 전두환 대통령이 한강물의 오염에 관심을 가졌고, 좋은 ‘정화조 개발’ 업무가 ‘대통령 긴급과제’로 KIST에 떨어졌다.
그러나 냄새나는 똥 연구에 아무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손을 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똥 장군을 지고 직접 인분을 밭에 뿌리기도 하고, 소똥으로 거름을 만들어 뿌리던 경험들이 똥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고 연구를 잘 해낼 수 있겠다는 판단의 밑바탕이 됐다.
이를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똥 연구’에 뛰어들었다.
“듣기만 해도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그래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한 덕분에 오히려 더 좋은 성과를, 더 많은 결과물을 낼 수 있었습니다”
박 연구원에게 '블루오션'이자 '블루칩'이었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똥’ 연구에 박차
“자나 깨나 똥 생각이었습니다. 심지어 남들은 평생 꾸기도 힘들다는 똥 꿈도 제 꿈에는 자주 나왔으니까요”
그는 인분을 효율적으로 정화할 수 있는 정화조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반적으로 분뇨는 냄새가 나고 비위생적이어서 화학물로 만든 ‘가짜 분뇨’로 대체해 관련 실험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비슷할 뿐 진짜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실험실에서는 결과가 좋게 나타났더라도, 현장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그는 기술의 실용화를 위해서는 직접 인분을 사용해 실험해야 한다고 판단, 주위 연구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랑인분처리장에서 똥을 퍼와 실험을 강행했다.
“냄새가 오죽했겠습니까. 반응조 위에 후드를 달아 냄새를 빼가며 실험을 진행했죠. 하지만 갑자기 정전이라도 되는 날엔 온 연구동에 냄새가 퍼져 다른 연구원들로부터 항의도 많이 받았습니다”
정화조에 넣은 미생물을 찾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분뇨를 빠른 시간 안에 분해하고 정화조 안에서 살 수 있는 미생물을 찾기 위해 전국의 산을 다 뒤지다시피 했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의 연구는 성공을 거뒀다.
또 90년대 초에는 이를 응용한 ‘축산분뇨정화조’가 탄생했다.
당시 축산농가의 98%가 영세농이었기 때문에 가축분뇨를 무단방류해도 규제할 법적 조항이 없어 인근 하천이 오염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 소규모 축사에 적용할 수 있는 그의 야심작 ‘축산분뇨정화조’는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나 다름없었다.
이후 농림부에서는 설치 자금의 70%를 지원해 주는 정책이 발표돼 전국의 약 5,000여 농가에 보급됐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08년 ‘대산농촌문화상’을 수상했다.
끝까지 축산분뇨연구에 매진할 터
“어휴, 말도 마세요. 한번은 농가에 설치한 축산분뇨정화조가 잘 돌아가는지 확인하려고 갔다 정화조에 빠진 적도 있었어요. 또 분뇨 샘플을 집에 가져왔다가 거실 바닥에 쏟아 며칠 동안 집안에서 똥냄새가 진동을 했던 에피소드도 있었지요”
2000년대 들어서는 대규모 가축분뇨 처리시설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합천, 경주, 창원의 축산폐수공공처리장과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장성과 거창 축산폐! 수공공처 리장 역시 그의 작품이다.
똥에 대한 국내·외 특허만도 40여건에 달한다. 또 2001년에는 한국공학기술상, 2002년 제1회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자상, 2008년 과학기술포장에 이어 20011년에는 올해의 과학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영역에서 밤잠을 설쳐가며 오로지 연구에만 매진했던 노력의 결실이다.
“정년 때까지 똥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 것입니다”
진짜 농민이 필요한 기술,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닌 직접 현장에 접목할 수 있는 연구를 통해 축산농가에 기여하겠다는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