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한국의 드라마가 전 세계인이 즐겨보는 콘텐츠가 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대 사건임에 틀림없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지상파 방송사에서는 외국의 방송을 보면서 베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PD들이 부산이나 일본 규슈지방에 출장 가서 일본의 오락 프로그램을 보며 '합숙연수'를 하거나, 일본의 통신원을 통해서 최신 프로그램 테이프를 공급받아 '해외동향'을 파악했다. 그리고 잘 기억하듯이 신문의 방송 때리기 소재는 주로 왜색, 모방, 표절 등이었다. 이러한 지적들은 예능 프로그램의 '저질' 논란과 더불어 증폭되었다.
하지만 2000년 들어 시대가 바뀌었다. 그 변화의 첫 단추가 바로 <가을동화>(2000년 방송)가 중화권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이어서 2002년 방송된 <겨울연가>는 일본에서 더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욘사마 신드롬까지 생겨났다. 간혹 한류의 시작을 MBC의 <대장금>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대장금> 첫 방송은 2003년 9월 방송되었고 얼마 전 방송 10주년 특집을 했다. 따라서 방송프로그램 한류의 시작은 <가을동화>와 <겨울연가>를 만든 윤석호 PD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견해이지만,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서 세 번의 큰 한류가 있었다. 첫 번째가 4세기말 백제시대 근초고왕 때 왕인박사가 천자문을 건네준 것인데, 왕인박사는 일본의 요청에 따라 주조기술자, 요리사, 가죽장이, 옷 만드는 사람 등 다양한 기술자들을 대동하여 전남 영암 상대포를 떠나 쓰시마의 와니우라(와니는 왕인의 일본식 발음)를 거쳐 본토에 들어갔다. 일본의 사케 중 맑지 않고 탁한 니고리 사케를 마신 적이 있다. 심지어 쌀도 동동 떠있어서 한국의 동동주가 연상되었다. 그리고 연달아 식혜가 떠올랐다. 식혜와 사케, 언뜻 발음이 비슷해보였다. 식혜, 삭혜 혹시 이 두 단어의 어원이 같은 것은 아닐까? 찾아보니 어느 학자가 이 두 단어의 연관성을 어원 ‘삭히다’로 분석해 놓았다(정대성, 1995). 일본 고사기에도 일본의 주신은 백제인 수수보리로 그가 일본에 술을 전했다고 한다. 이것이 첫 번째 한류가 아니고 무엇이랴.
두 번째의 한류는 1400년대부터 400여 년간 이어져 온 20여회의 조선통신사 파견이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다녀간 다음에는 한국 풍 문화가 붐을 이뤘다고 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뭔가 앞선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그렇게 비용을 감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통신사가 1811년 파견된 뒤 일본제국주의 시대를 거쳐서 200여년이 지나 다시 한국의 대중문화가 일본에 쏟아진 것이다. 윤석호 PD의 드라마는 역사적 의미에서 큰 이정표를 만든 것이 분명하다.
윤석호 PD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제일기획에 PD로 입사했다가, 1985년에 11기로 KBS에 입사했다. 그는 예능국에서 조연출을 하다가 드라마 국으로 건너가 <느낌>, <사랑의 인사>, <컬러>, <프러포즈>, <웨딩드레스>, <순수>, <광끼>, <초대> 등의 드라마를 만들었고, 4계절 시리즈와 얼마 전 종영한 <사랑비>를 제작했다. 그의 드라마가 일본에서 특히 많은 인기를 누린 덕분에 한국 방송 PD로서는 특이하게 제77회 키네마준보상 특별상 '한일우호 공로상', 일본 NHK ‘특별공로상’, 일본 프로덕션연합(ATP) ‘해외특별상’ 등을 받았다. 2009년에는 서울관광대상 최고 공로자상을 받기도 했다. 한류를 열고, 한국 방송콘텐츠의 수준을 높였으며, 한국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올린 사람으로 기억될 윤석호 PD. 오랜 프로덕션을 잠시 멈추고, 10월말 영국으로 안식년을 떠나기에 앞서 그를 홍대 앞 윤스칼라 사무실에서 만났다.
홍: 너무 바쁘신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 아니에요 저도 이래서 정리가 되죠. (웃음)
홍: 계속 일본 왔다 갔다 하시고 바쁘신 거 같아요.
윤: 그러니깐 <사랑비>를 끝내고 원래는 일본에서 드라마를 하기로 했어요. 특집드라마. 그전에도 뭐 계속 일본 영화사하고 얘기가 되다가 한일관계가 좀 냉랭해지면서 시간이 너무 지체되고 그냥 기다리긴 뭐해서 저는 영국에 다음 주(10월 말)에 가요. 방문연구원(Visiting Scholar)으로 그쪽 세미나와 이런 것들을 들을 수 있어요. 가기로 결정하고 교수들 만나고 왔는데 다시 일본에서 보자고 해서 갔더니 영화제작이 결정됐어요. (웃음). 근데 뭐 영화를 제작해도 (영국에서)기획은 할 수 있는 거니깐…. 일본에서 다음 콘텐츠를 만들 거 같아요. 일본이 제작하고 저는 연출만 하는 그런 시스템으로 말입니다.
홍: 그 어떤 회사하고 하시는지…….
윤: 그거는 좀 미리 얘기하기가……. 쇼치쿠인데.
홍: 아 쇼치쿠예요?
윤: 아직 뭐 계약하고 이런 게 아니라서
홍: 제작은 쇼치쿠에서 하고 연출은 윤 PD님이?
윤: 네. 그 전에도 계속 시도했는데 예산이 너무 많이 드는 걸 제가 기획해서 무산이 됐어요. 이번엔 그쪽에서 기획하고 시나리오 작업까지 하고 저는 감독만 하겠다고 해서 몇 가지 책을 보고 있죠. 그쪽은 제 취향을 아니깐 그런 류로 찾더라고요. 그래서 뭐 아시다시피 한국에서는 <사랑비>도 그 예가 될 수 있지만, 제가 추구하는 작품들이 약간은 최근의 스피디한 트렌드하고 잘 섞이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잖아요? 영화는 드라마 PD들이 하고 싶은 장르고 그래서 저한텐 좋은 기회인 거 같아서 다시 한 번 재도전을 하려고 의욕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웃음)
홍: (웃음) 그럼 영국은 어느 학교에?
윤: 런던대학교 한국어과와 내년 4월 20일부터는 옥스포드대 한국어과입니다. 옥스포드는 두 달 짜리고, 런던대는 일 년짜리로 겹쳐있어요. 런던대학에 (제안서를)보냈는데 답이 안 와서 옥스포드에 보냈는데 됐어요. 그래서 옥스포트에 가기로 했는데 뒤늦게 런던대학에서 연락이 왔어요. 난 둘 다 하겠다고(웃음) 뭐 한류덕분에 받아줬죠. 그래서 글로벌한 측면이 아무래도 많이 부족했는데, 일본은 많이 접촉했지만 시야가 좁은 거 같아서 다시 한 번 시도하는 그런 마음으로…. 나이가 자꾸 먹으니깐 그런 부분을 느껴요. 지금 떠나기 직전이에요. 이달 말 비행기 타면 내년 8월 중순까지 있을 겁니다.
홍: 그래도 이렇게 PD로서 갈 수 있다는 게 참 행운이신 거 같아요.
윤: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겨울연가>라는 한류 성취가 있어서 제가 좀 그럴 수 있죠. 애도 없고(웃음). 결혼을 늦게 해서 애가 없으니깐 애 있는 친구들은 아무래도 바쁘죠.
한국 지상파 PD들의 직무행태 중 가장 경이로운 것이, 예능, 교양의 경우 거의 매주 1편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의 경우는 기획할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여유가 있지만, 외국의 경우와 비교하면 넉넉한 편은 아니다. 따라서 창의적인 PD들은 스스로 안식월이나 안식년을 만들어 재충전해야 하는 상황이다. 강도 높은 노동 강도는 PD들의 조로현상을 부추기며, 창의적인 기획을 막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안식년을 떠나는 PD들은 자연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성장 과정에 따라 자연, 첫사랑, 영상미가 화두로
홍: 아버님이 서울대 교수셨다고…….
윤: 서울대가 아니라 지금은 시립대죠. 거기가 옛날에 서울시립농업대학이었어요. 농촌사회학 전공이셨어요. 거기는 농업대학교여서 대학 캠퍼스 자체가 시골이었어요. 왜냐면 실습지였기 때문에 원예과가 있으면 꽃밭이 있고, 축산과가 있으면 목장이 있고…….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거기서 생활했죠. 교수 자택이 그 안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거긴 나오면 도시고, 들어가면 전원인 특이한 공간이여서 저의 감수성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했어요. 자연을 좋아하고 그래서.
홍: 거기서 언제까지 사신 거예요?
윤: 고등학교 2학년 때(1973년) 농업대학에서 산업대학으로 바뀌면서 그곳에서 나와서 서울에서 살았죠. 그곳에서 사춘기를 보낸 거죠. 제 기억에 꼬마일 때 장 크리스토프, 베토벤 위인전 등을 읽고 전원에서 악성이 떠오를까 해서 오선지 들고 막 걸었던 기억이 있어요(웃음). 좀 그런 쪽을 좋아했어요.
홍: 결국 영상으로 고전을 만드셨네요!
윤: 네, 영상으로. <가을동화> 때 본격적으로 했고 그 동안은 도시 얘기를 많이 했죠. 2000년 들어오면서 화두를 던지기 시작했죠. 내가 좋아하는 자연친화적인 작품, 동화 같은 걸 했는데, 대만과 동남아시아에서 인기를 얻었어요. 그때 깜짝 놀랐죠. 아 그런 어떤 보편적인 거는 다 똑같구나.
홍: 형제 관계는 어떻게 되세요?
윤: 제가 막내에요 보통 막내들이 조금 이기적이잖아요. 형들이 다 일을 처리하니까. 대부분 뭐 예술가들이나 소설가들 통계를 보니깐 막내하고 외아들이 제일 많다고 하더라고요. 집안일에 무신경하고 자기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이기적인 성향이 좀 있죠. 막내여서 저도 그렇게 됐던 거 같아요.
홍: 성격은 어떠셨어요?
윤: 저는 내성적이었어요. 그리고 특히 일기 많이 썼어요. 그때만 해도 중학교도 시험보고 들어갔는데, 저는 1차 떨어지고 2차 시험 볼 때 성격 고치라고 남자다워져야 한다고, 얘기 들었어요. 제가 약간 소프트했으니깐 여리고 소프트하고 그래서 중동고등학교 들어가서 성격을 개조하려고 기타 배우고 교회 다니고 RCY 활동했어요. 중동(중동고등학교) 아이들의 특징이 있잖아요. 그때 첫 사랑도 하고, 가수가 되겠다고 기타 배우고 노래도 불렀어요. 노래 좋아하는 모임에 대한 어떤 향수가 있었던 거예요. 나는 그만큼 못 하지만 그 멤버들이 노래 잘 해서 나는 듣기만 했지만(웃음) 워낙 그런 걸 좋아했죠. 성장 얘기를 계속 하자면 첫사랑을 얘기해야 하는데요. 제 드라마에 첫사랑이 무지 많이 나와요. 거의 모든 드라마가 첫사랑인데. 지금도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야 이제는 잊었냐?” 그럴 정도로 후유증이 되게 오래 갔죠. 그것 때문에 대학 떨어지고 질풍노도의 시절이 시작됐죠. 재수하고 삼수까지 하고 대학 들어가자마자 군대 가고 20대를 ……. 취업은 제대로 해야 되겠다 싶어서 공부 열심히 해서 제일기획에 들어갔죠.
홍: 어떤 분야?
윤: 제일기획에 PD로 들어가서 광고를 찍었어요